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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부엌-상자들/이경림

by 시인들국화 2023. 5. 29.

 

부엌-상자들/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
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 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 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그래? 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 밥하던 여자들은 다 어딜 가구?
밖으로 나갔어요. 엄마, 밥 따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 저기 줄줄이 걸어나가는 여자들을요
깔깔깔(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움켜 쥐고 웃었다)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야. 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모기만한 소리로) 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시 읽기1> 부엌-상자들/이경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는 엄마라는 이름을 헤아릴 나이가 된 딸이 엄마에게 부엌이 좋으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는 이 물음을 알아듣지 못한다. 엄마가 식구에게 밥해 먹이는 일이 좋아서 하거나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엄마는 그런 물음을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키면 밥을 하고 싫으면 밥을 안 해도 되는 선택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고 싫고를 생각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좋으면 태어나고 싫으면 안 태어날 수 없듯이, 좋으면 숨 쉬고 싫으면 숨을 안쉴 수 없듯이, 좋으면 죽고 싫으면 안 죽을 수 없듯이, 먹는 일도 좋고 나쁨의 선택을 떠나 있다. 인간에게 입이 있고 위장이 있는 한, 어머니에게 식구가 있고 자식이 있는 한, 그것은 결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선택이 될 수 없다. 그 밥의 준엄한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곳이 부엌이요.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이 땅의 오랜 관습도 그런 선택을 떠나 있다.
오후 여섯 시, 마요네즈 군대가 쳐들어 온다/토마토 군대가 쳐들어온다/그 끔찍한 남편과 아이들이 쳐들어온다”(접시라는 이름의 여자)고 송찬호 시인도 밥 차리는 전쟁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일생 동안 밥을 해대도 그치지 않고 쳐들어오는 밥때. 그 적과 싸워 어떻게 이기겠는가. 어떻게 밥과 싸워서 밥을 안 해도 되고 밥을 안 먹어도 되는 세상을 이루겠는가. 밥을 안 먹어도 되는 입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먹어도 먹어도 결코 채워지는 법이 없는 위장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 싸움은 백전백패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싸움이다. 밥하기는 끝나지 않는 책임과 의무요. 어머니는 그 일에서 결코 퇴직할 수 없는 직업이다.

위 시에서도 병원에 입원하여 밥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새벽에 몰래 부엌을 찾는 어머니는 부엌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는 딸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엌이 없는 세상이라니! 식구들에게 밥을 해 먹이지 않는 어머니라니! 어머니에게는 병원이든 거리든 도시 한복판이든 다 부엌이 된다. 부엌이 되어야만 한다. 세상은 엄청나게 큰 부엌일 뿐이다. 인간이 밥을 먹고 살아가는 한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이성복, 밥에 대하여)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정말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밥 고행, 부엌 고행, 어머니 고행을 얼마나 해야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눈앞에 닥친 죽음보다도 딸의 도시락과 아버지의 밥상이 더 걱정되는 경지, 밥걱정의 힘이 병실이며 복도며 문밖의 모든 세상을 다 부엌으로 바꾸어버리는 경지. 세상 한 복판에 걸린 큰 밥솥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아침마다 전철과 버스와 도로는 출근 전쟁이다. 세상은 큰 밥그릇 싸움터다. 그러니 어서 부엌으로 가 밥을 해야지 병원에 누워있거나 죽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 온 세상이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변형되도록 한평생 밥을 해대더니, 드디어 어머니에게 밥은 종교가 되고 신이 된 것이다. 부엌은 신전이 되고 밥하기는 예배가 된 것이다.

밥에 갇힌 어머니, 부엌에 갇힌 어머니, 어머니에 갇힌 어머니. 어떻게 어머니를 이 감옥에서 구해낼 것인가, 평생 어머니를 가두고 부려 먹고 억누르던 밥이 이제는 어머니의 유일한 삶의 이유가 되었다. 밥하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어머니는 갑자기 늙고 병들고 죽고 말 것이다. 이제 밥 고행은 감옥이 아니라 구원이 된 것일까. 딸이라고 해서 죽을병이라고 해서 어떻게 그 거룩한 고행의 즐거움을 어머니에게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이기도 한 이경림 시인은 마지막까지 밥을 하려다 순교한 어머니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밥의 역설 어머니의 역설 앞에서 말을 잃는다.

김기택다시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다산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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