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 정재현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도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부란, 〈결혼에 대하여〉 쉽지 않은 말씀이다. 함께 있으면서 거리를 두라니, 사랑하면서도 구속하지 말라니, 마음을 나누면서 묶지를 말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된다면 서로에게 구속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된다면 서로에게 구속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 구속도 불사할 정도의 사랑이라야 참된 사랑이 아닐까? 그런데 사랑을 명분으로 집착에 빠지니 사랑과 구속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아가 본말이 전도되어 구속이 사랑을 명분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더 이상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구속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많은 비극들이 여기서 비롯된다. 하나라고 묶는 것이 마음을 한데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옭아매어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잘 사귀어오던 연인들 사이에서 한쪽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다른 한쪽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한 경우 주변 사람들을 향한 살인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래서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 거리가 생명을 살리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라고 하는 동일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숭앙되어 왔다. 그러나 모두가 같고 나아가 하나여야 한다는 이념은 모두에게서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앞뒤가 있고 위아래가 있게 된 사회에서 가진 자들이 그들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기준으로 엮어낸 현상유지 전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구호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결집하여 좋은 목표를 이루는 동력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면에 있는 거리를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집단주의적인 광기로 몰아가기도 한다. 하나라는 이념이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끔찍하고도 잔인한 폭력으로 나타났는가를 돌이켜본다면 무수한 하나들 사이의 거리는 참으로 중요하다. 일상에서 사랑을 명분으로 집착하고 속박하는 경우 거리는 꼬인 문제를 풀어낼 해법이 되기도 한다. 관건은 사랑과 구속 사이의 경계를 가르는 일이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서부터 구속일까? 참나무와 삼나무가 어우러진 숲이 우리에게 구별의 지혜를 준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늘로 덮어버리면 서로 자랄 수 없다는 자연의 이치가 해법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거리는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청림출판, 2020. |
*박수호 시 창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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