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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님 성탄 성당 (The Church of the Nativity ) - 이스라엘 성지순례 1

by 시인들국화 2018. 3. 23.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리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루카복음 2, 1-7)




예수님 성탄 성당 (The Church of the Nativity )


서기 324년 콘스탄티누수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는

베드레헴에 순례 와서 예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그 위에 성당을 짓게 하였다.

339년 5월 31일에 성당을 축성한 첫번째 성탄 성당을 콘스탄티누스 성당이라 한다. 







대리석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장식된 웅장하고 화려했던 이 성당은 6세기초에 불타버렸지만

다행이 콘스탄티누스 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 일부가 지금의 성탄 성당 중간 지점에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성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1년에 완공한 것인데,

그 후 지붕과 바다과 내부 장식정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 벽면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 - 더러워진 성당벽을 청소하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닥을 장식했던 대리석 모자이크 )



(성당입구와 나무문- 머리를 숙여야 들어올 수 있다)


외부에서 볼 때는 요세처럼 보이며 성당의 입구는

페르시아 침입자들이 말을 타고 교회에 들어와 약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좁고 낮게 지어졌다.

이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입하였을 때 대부분 교회가 파괴되었으나,

이 성당은 그 당시 교회 정면에 있던 그림 덕분에 파괴되지 않았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왔던 세 명의 동방박사가 페르시아 복장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들이 이 성당을 남겨두었다고 전해진다.

이 성당의 나무문은 1227년 아르메니아왕 헤트론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지하에 있는 예수님 탄생지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을 기다리는 순례자들)



(예수님 탄생지)


예수님의 탄생하신 장소에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셨다."(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으며,

가운데 구멍만 남겨놓고 별모양의 은으로 장식되어 있다



(예수님 탄생지의 별)


(순례자들은 탄생별에 입을 맞추며 경배한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마을로,

베들레헴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시대에 언급된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이렇게 죽어 에프라타 곧 베드레헴으로 가는 길에 묻혔다."(창세 35,16-20)

오늘날 라헬의 무덤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는 검문소 근처에 있다.

베들레헴은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지역 웨스트 뱅크(서안지구)에 의해 위치해 있는 팔레스타인 도시로 인구는 3만여 명이며,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이스라엘의 분리정책에 따라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여 고통 받고 있다.


- 모든 설명글은 분도여행사 순례책자에서 발췌함 -






(팔레스타인지역인 베들레헴은 물사정이 좋지않다. 순례자 숙소에서 머물었던 이날 아침 우리방에 물이 안 나와 겨우 고양이 세수로 만족해야했다.)







출처 : 로즈마리
글쓴이 : 하늘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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