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관념의 시적 형성화
- 임종천의 시 세계 -
유 승 우(시인, 인천대 국문학 교수)
이제부터 나는 시인 임종천을 만나야 한다. 임종천 이란 이름도 잊어버리고 그냥 한 시인을 만나야 한다.
한시인의 몸짓과 음성과 눈빛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의 그리움과 아픔과 외로움을 만나야 한다.
시는 ‘詩’라는 한자에서 온 말이다. 詩는 ‘言’과 ‘寺’의 만남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학 학자 조셉 켐벨은 사원은 신의 집,
혹은 신의 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詩’는 신이 살고 있는 집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성전이다.
우리말로는 시를 ‘노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래는 『놀+애』가 되는데 ‘놀’은 우리 옛말에서 ‘神’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노래속에도 신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속에 있는 神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신이며, 영혼이며, 마음이다.
그러므로 시는 살아있는 영혼이며, 살아있는 마음이다.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며,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다.
나는 앞에서 임종천이란 이름도 잊어버리고 한 시인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시인을 만나는 것은 시를 만나는 것이며, 시를 만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과 마음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시인의 영혼을 만나보기로 하자.
잠들고 싶다. 붙이지 못하는 편지로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
햇빛 속에서 부서지는 찌고이네르바이젠 음률로
잠들고 싶다.
바람에 울렁이는 밀밭의 맥박 소리로
나비의 치솟는 춤사위로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
아, 하늘과 땅의 거리가 너무 넓어
당신과 나의 거리가 너무 길어
하늘 옷 끌어내리려는 안타까운
종달새의 몸부름으로
잠들고 싶다.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이것이 사랑이야”
식충꽃에 큐어핏 화살을 맞은
순전한 꿀벌의 사랑으로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
『잠들고 싶다,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전문
현대시를 정의해서, ‘시는 존재다’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존재란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싸르트르는 인간 존재를 인간외의 다른 존재와 구별해서 ‘대자(對自)’라 했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의식적 존재라했다.
이것을 한자어로 ‘욕구’나 ‘욕망’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꿈’이나 ‘바람’이며,
실제 사용에서는 ‘∼고 싶다’라는 보조용언으로 나타난다.
위에 인용한 작품은 그 제목이 『잠들고 싶다,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이다.
그렇다며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실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잠들고’와 ‘그대’가 무엇을 상징하느냐를 구명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1, 3연은 ‘잠들고 싶다’로 끝났으며, 2, 4연은 ‘그대에게 다거서고 싶다’로 끝났다.
1, 3연의 끝 행인 ‘잠들고 싶다’에 바로 앞 어절을 붙여서 쓰면 ‘음률로 잠들고 싶다’와 ‘몸부림으로 잠들고 싶다’가 된다.
여기서 ‘음율’이나 ‘몸부림’은 ‘잠들고 싶다’와 상반되는 이미지이다.
이로 보아 여기서 ‘잠들고’는 일상적인 의미의 잠들고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부조화나 불균형에서 생명적인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든가 마음의 평안을 희구하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의 ‘잠들고’는 그 말의 일상적인 의미인 죽음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본 자리인
존재에 대한 향수이다. 2, 4연의 끝 행에 나오는 ‘그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비의 치솟는 춤사위로 그대에게 다거서고 싶다”라든가 “순전한 꿀벌의 사랑으로 그대에게 다가서고 싶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명의 핵심에 다가서고 싶다는 의미이다.
이도 역시 존재에 대한 향수이다.
인간의 본래의 고향인 ‘에덴’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사건 이래 누구나 죄인이며,
죽음이 있는 타향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그대’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작품의 주제는 하나님에게 다가서서 영혼의 평안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제가 아니라,
이러한 주제를 임시인이 종교적인 설교조나 관념적인 서술이 없이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사실이다.
임종천 시인이 목사이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시정신이 그만큼 치열하게 타올랐기 때문이리라.
발걸음들이 닭을 쫓고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나는 꿈도 아닌 환상을 보고 있다.
어디선가 풍악소리가 메아리인양 들려오는데
가슴은 오염된 물에 중독된 붕어 한 마리
거품을 토하며 몸을 비틀 듯 답답하다.
방안에는 곰팡이로 꽃밭을 이루어
나는 향기에 중독이 되고
나는 꿈도 아닌 환상을 보고 있는가?
마누라는 무수한 발걸음으로 나는 쫓는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르려고 하였으나
닭은 날지 않는다는 통념 때문에 체념한다.
(그래도 날면 담은 넘을 수 있는데 …)
내가 닭일까?
나는 쫓기는 내 모슴을 스케치 하고
나는 꿈도 아닌 환상을 보고 있다.
마누라가 닭이 되어 … 쫓기고 있다.
『꿈도 아닌 환상』전문
시인은 에덴을 꿈꾸는 사람이다. 존재에 대한 향수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품고 있는 사람이다.
존재에 대한 향수란 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다시 에덴에로의 복귀를 꿈꾸는 것이며,
신과의 교통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은 현실에서,
“가슴은 오염된 물에 비틀 듯 답답하다”라고 호소 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현실의 “방안에는 곰팡이로 꽃밭을 이루어 나는 향기에 중독이 되고 나는 꿈도 아닌 환상을 보고 있는가”라고
자문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어린아이와 아내이다.
시인은 언제나 현실에서 쫓기고 있다. 그것을 ‘아내는 무수한 발걸음으로 나를 쫓는다’라고 했다.
시인은 현실에서 쫓겨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르려고 하였으나 닭은 날지 않는다는 통념 때문에 체념한다’라고
체념과 미련을 반복한다.
이것이 아마 존재에 대한 향수를 지닌 시인의 아픔으며, 또한 절대자를 향한 목자의 고뇌일 것이다.
①
외로운 몸뚱아리는 썩은 등걸
온 몸으로 슬픈 벌레들이 기어다닌다.
장수하늘소가 색종이 오리듯 햇빛을 다듬는 날
백로는 내 몸에서 벌레 사냥을 하고
마취제를 맞은 환자처럼
나는 황홀하게 까무러쳤다.
하늘은 파헤쳐진 가슴에 가루를 뿌렸다.
아아, 나는 허물어트려다오.
나를 불질러다오.
부서지고 바서져
그대 꽃을 향기롭게 하는 흙이 되고 싶다.
- 『등걸』 전문
②
사막같은 그대의 몸뚱아리에
모세의 지팡이 닮은
나의 입술을 박아
오아시스에서 파닥이는 물고기와 같은
그대의 씽씽한 진실을 만나고 싶다.
모래바람이 부는
그대의 심전에 붉은 장미꽃을 피우고 싶다.
갈라진 홍해가
다시 닫치듯
그대의 두 손바닥에서
익사하는 쾌감도 맛보고 싶다.
- 『모기에 관한 이단설 2』전문
위의 작품 ①에서는 ‘외로운 몸뚱아리는 썩은 등걸’이라고 했으며, ②에서는 ‘사막같은 그대의 몸뚱아리’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몸뚱아리는 시인의 육신을 말함이다.
①에서는 화자가 바로 시인이며 ②에서는 모기의 입을 빌어 한 말이다.
‘썩은 등걸’과 같은 육신은 “마취제를 맞은 환자처럼 나는 황홀하게 까무러쳤다.”라고 하여
육신이 썩은 등걸과 같이 파헤쳐졌을 때 하늘과의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까 썩은 등걸과 같은 몸뚱아리는 시인의 답답한 현실이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존재에 대한 강열한 향수다. 시인은 다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나를 불러질러 다오, 부서지고 바서져 그대 꽃을 향기롭게 하는 흙이 되고 싶다”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작품 ②에서는 모기의 입을 빌어 ‘사막같은 그대의 몸뚱아리’라고 했다.
이제 모기는 모기가 아니라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지팡이 닮은 나의 입술을 박아 오아시스에서 파닥이는 물고기와 같은 그대의 씽씽한 진실을 만나고 싶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대의 심전에 붉은 장미꽃을 피우고 싶다”라고 하는가 하면 “그대의 두 손바닥에서 익사하는 쾌감도 맛보고 싶다”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존재를 회복하기 위하여, 에덴에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순교라도 하고 싶다는 시인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임종천 시인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기독교적인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한편의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이것은 임종천 시인이 시와 신앙의 새로운 만남을 이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식적으로는 신앙과 시는 시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고식적인 기독교인은 목사가 시를 쓴다면 목사로서 타락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염려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시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앞에서 역설했던 것이다.
임종천 시인에게서 나의 이러한 시론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꽃물을 들였어요
빨갛게
고백할 수 없어요
부끄러워서
발자국 소리에도 가슴이 콩콩 뛰어요.
팍, 터질 것 같아서
빨간 손톱으로 그대의 가슴에 생채기 낼거예요.
미워서
- 『봉선화』전문
우리 와락 끌어안고
저 절망의 낭떠러지를 넘어
폭포수같이 시퍼런 강물이 될까요?
유혹하는 너의 불타는 눈빛
너를 안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만년을 사는 것 같다.
- 『양귀비 꽃』전문
꽃은 자연의 사랑고백이다. 꽃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낸다.
꽃들의 이처럼 은밀한 사랑의 고백을 임종천 시인은 들었던 것이다.
또한 꽃들이 온 몸으로 써내는 연서를 읽은 것이다. 여기서는 두 편만 인용했지만 22편의 꽃시가 더 있다.
어떤 꽃말보다도 감동적인 꽃들의 사랑고백이다. 꽃은 꽃다운 것이다.
봉선화는 봉선화답고, 양귀비 꽃은 양귀비 꽃답다. 봉선화가 수선화와 같을 수는 없다.
봉선화의 그 빛깔과 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임종천 시인은 듣고 읽은 것이다.
“발자국 소에도 가슴이 콩콩 뛰어요/ 팍 터질 것 같아서”라는 봉선화의 사랑고백을 들어보라.
양귀비 꽃의 타는 듯한 개화 앞에서
“유혹하는 너의 불타는 눈빛/ 너를 안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만년을 사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꽃의 피어남에서 영원을 읽은 시인의 고백이다.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장 큰마음인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말도 추상적이다.
공자도 “하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사시가 운행하고 만물이 소생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꽃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빗소리와 눈송이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이미지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러니까 시도 이론이 아니다. 종교나 문학의 이론은 관념이다.
특히 종교적 관념에 사로잡히면 시적감각이 무디어 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가 아닌 설교조의 넋두리를 늘어놓게 마련이다.
그런데 임종천 시인은 종교적 관념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설교하지 않고, 서술하지 않고 시로 꽃피우고 있다.
그대는
내 외로운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눈물방울
나는
그대 눈물방울 속으로
걸어들어가
詩를 쓰는
붕어
- 『나사렛 예수』전문
이 작품은 임종천 시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임종천의 시론이면서, 종교이면서, 삶 자체이다.
“내 외로운 등을/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눈물 방울”과 같은 주님의 사랑 속에서,
“나는/그대 눈물 방울 속으로/걸어들어가/詩를 쓰는 붕어”라고 고백하고 있다.
주님의 사랑 속에서 숨쉬는 붕어이다. 주님의 사랑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삶 자체이다.
나는 임종천 시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깊이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를 통하여 임종천 시인의 생명과 삶을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앙과 시가 더욱더 주님에게 다가서기를 비는 마음으로 이글을 마친다.
* <한국 현대 시인 연구> 유승우 저, 국학자료원 출간. p331 ~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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