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
- <벌레잡이통풀 - 네펜데스 알라타>를 보며
내 방 안에는 식물이 없다. 그 흔한 난화분 한 개 없다.
그렇다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집 안 거실이나 방 안 책상 위에 화분을 둘 공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꽃과 풀 그리고 나무는 산과 들에 있어야 제맛이기 때문이다.
비바람 맞으며 자라야 할 산과 들의 식물들이
화분에 담겨 인간이 던져주는 양식으로 성장하다 보니
그들이 지녀야 할 본성을 잊은 채 인간들의 욕심을 채우는,
한낱 관상용으로밖에 자라지 못한다.
그러니 때로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참 안타깝기도 하다.
일본이 자랑하는 소나무 분재를 보면서는
아름답다거나 멋지다는 생각보다는,
저렇게 몸통이 비틀어지고 가지는 굽고
거기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통째로 누워버리느라
저 소나무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나로서는 방 안에 식물을 가두어두지 못한다.
일종의 결벽증이다.
그래서 산과 들을 거닐 때 마주치는 온갖 식물들과
그냥 눈인사로 내 사랑을 전할 뿐이다.
식물뿐일까.
진돗개는 진도에 가면 똥개이다.
하루 밥 한 끼만 준다.
마을길을 돌아다니며 혹은 들판과 밭에서
인간이 먹다 남긴, 그리고 버린 음식 찌꺼기들을 주워먹으며
제멋대로 뛰고 뒹굴고 성장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주인이 만들어 놓은 마당 한귀퉁이 개집에서 잠을 잔다.
아무리 추워도 저들끼리 몸으로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난다.
그러나 저녁 밥 한 끼 주는 주인에 대한 고마움을 안다.
그러나 일단 진돗개가 진도라는 섬을 벗어나면 일반 애완견으로 변하고 만다.
일이 년 후에는 본성마저 잊어버린다.
진돗개뿐일까. 풍산개, 삽살개, 오수개, 제주개… 마찬가지이다.
본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그늘 속에
그저 ‘애완‘용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개나 고양이를 절대 방 안에 들이지 않는다.
내 사고방식 속에 그들은 인간과 함께 살아갈 가축이지만
그렇기에 당연히 마당에서 커야할 동물들이다.
애완동물에 '반려동물'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동물을 사랑하자고 그렇게 외쳐놓고는
더럽다는 이유로 암컷의 생식 기능을 잘라내버리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목청을 없애버리는가하면
자기 보기 좋게, 자기 취향에 맞게 털까지 깎아버린다.
이런 행동들이 과연 누구를 위하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동물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야말로 이기적인 인간의 욕구충족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식물도 동물도 모두가 인간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니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인간에 의해 인간 품 속에 갇히면서,
자연상태의 그들 본성을 잊은 채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는 분명 인간의 이기심이 빚은 자연파괴이다.
언젠가 어떤 글에서 <자연보호 하지 마라. 그냥 내버려두라>고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해 놓고 이제 와서는 자연보호를 하겠단다.
그럴 필요 없다.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면 저들끼리 잘 살아간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연 속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고 방 안의 식물들과 애완용 동물을
모두 야생으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자연의 생태를 파괴하거나 자연의 본성을 잊게 만드는 일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애완견 혹은 반려동물을 안고 다닌다거나,
거실과 베란다에 온갖 화분을 키우는 사람들을 흉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이요 사고방식이며,
그것이 반드시 나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얼굴 다르고 이름 다르듯이 그런 사고방식이 나와 다를 뿐이다.
애완동물과 화분 키우기가 흔한 것이 된 세상,
나 같은 놈도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 뿐이다.
.
.
.
각설하고.
새벽녘에 내가 함께하는 한 카페의 <회원작품사진방>에 올라 있는
사진 작가 ○○님의 글과 사진 <삼청동 길을 거닐다>를 보았다.
삼청동을 잘 알기에
사진 속 꽃과 풍광을 보며 어디쯤일까를 가늠해 보기도 했고,
사진 속 꽃들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내보았다.
몇 개는 긴가민가해서 내 컴퓨터 속 자료사진을 찾아봐야 했고
또 몇 개는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함께 여행길에 나설 때마다 아주 멋진 사진을 선물해주는
사진작가의 글과 사진이라 좀 더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누군가 이 꽃 이름 물어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덧글로 꽃 이름들을 순서없이 쫘~~악 적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에 문자가 오더니 내 예측대로이다.
<쌤, ○○님 올린 거 세 번째 꽃, 이름이 모야여??>
아래 사진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벌레잡이통풀 - 네펜데스 알라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뭐야~~?, 할 것이다.
원래 <네펜데스>인데, 우리 인간들이 관상용, 원예종으로 변형시켜
<네펜데스> 뒤에 <알라타>라는 원예종 명칭을 붙여 부른다.
우리말로는 ‘벌레잡이통풀’이지만 그 명칭 또한 다양하다.
네펜데스(Nepenthes)는 동남아 밀림지역에 서식하는
식충(食蟲 - 벌레를 잡아 먹는)식물로 그 종류가 백여종이 넘는다.
식물이지만 잎 끝에 달린 통으로 곤충, 벌레 등을 잡아 육식을 한다.
원산지의 <네펜데스> 몇 종류를 보자.
이러한 식물들을 밀림에서 가져와 관상용, 원예종으로 변형시켜 화분에 담아
인간들의 정원이나 집 안에서 키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네펜데스 알라타(Nepenthes allata)>이다.
양과 개를 복제하는 인간의 과학실력이니 식물을 변형시키는 것이야 진작부터 해 온 일이다.
아래 사진은 집 안 혹은 정원과 길거리에서 키우는 <네펜데스 알라타>들이다.
당연히 밀림 속 원래 모습보다는 우리들 눈에 이쁘다.
저들이 집 안에서 혹은 정원에서 파리와 같은 곤충, 벌레들을 잡아먹을까.
대충 짐작하였듯이 그렇지 못하다.
왜냐고?
밀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저들의 본성이 인간에 의해 지워져야만 했다.
벌레를 잡아야할 통 속에는 점액이 안나오고 그러니 지금은 벌레를 잡지 못한다.
만약 점액이 계속 나와 벌레들을 유혹한다면 인간의 집안은 온갖 벌레들로 가득찰 것이니,
즉, 그 본성을 잃지 않는다면 인간과 함께 살지 못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벌레들 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기에 좋으니 그 모양만 유지하면 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밀림의 한 식물의 본성을 없애버린 것이다.
밀림의 벌레잡이가 인간의 곁으로 온 순간, 벌레를 잡기는커녕
벌레잡이 통으로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는
괴상망측한 혹은 멋스러운 모양만으로 보여주며
인간이 때맞추어 주입하는 물과 영양분을 먹고 산다.
재미있는 것 한 개.
원래 <네펜데스>는 통마개 안의 점액(꿀)으로 벌레를 유인하여 빠뜨린 후
그들을 녹여 영양분으로 섭취하는데
종종 원숭이들이 지나가다 통을 들어서는 통째로 점액을 마셔버리기도 한다.
벌레들에게는 위험한 점액이지만 원숭이들에게는 맛깔스런 음료수라 할 수 있다.
자연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야 하는데
인간이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
.
○○님이 올린 글과 사진 속에서 <네펜데스 알라타>를 보고는,
문득 우리 인간들이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아닐까,
공자님 말씀에 따르면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했는데
이러다가 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한다.
누구 말마따나 ‘쓀때없는’ 걱정이 많은 <이병렬>이다.
참고로, <네펜데스 알라타>는 꽃집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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