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빈집 / 문태준
시인들국화
2025. 2. 26. 00:18
빈집/문태준
지붕 위로 기어오르는 넝쿨을 심고 녹이 슨 호미는 닦아서 걸어두 겠습니다. 육십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렵니다. 흙손으로 무너진 곳 때워보겠습니다. 고리 빠진 문도 고쳐보겠습니다. 옹이 같은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아 뱀 넘나 들지 않게 깨끗한 달력 그 방 가득 걸어도 좋겠습니다. <시 읽기> 빈집/문태준 다섯 개 문장과 두 연으로 짜인 짧은 시, 제목은 「빈집」이지만 이 시는 독자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고향 사람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집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가 빈집에 들어서서 들려주는 목소리는 소박하고 차분하다 정다운 친구에게 은근히 속내를 보여 주듯 “옹이 같은 사랑은 날 좋은 대패로 밀고” 문지방에 백반을 놓는 화자의 행위는 실향민이 다 되어 가는 현대인의 마음을 흔든다. 지붕, 넝쿨식물, 녹슨 호미, 알전구, 흙손, 고리 빠진 문이 환기하는 것은 과거의 풍경이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이 단어들은 자본과 문명에서 못 벗어나는 우리에게 문명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도록 새 길을 터줌과 같다. 걸어두겠고, 때워 보겠다는 등의 동사動詞는 농사일에 밀착된 정서적 풍요로움까지 선물한다. 개발 또는 문명화라는 말에 휘말려 산천이 함부로 파헤쳐지는 오늘을 누구든 보고 산다. 옛모습을 고이 간직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사정이 이런 데도 화자는 인적이 끊긴 집에 정을 붙이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익혔을 노동의 토막에 기대듯 “육십 촉 알전구일랑 바꾸어 끼우고 부질없을망정 불을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다짐이 쓰라리게 정답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전깃불만이 아니다. 논밭 옆이나 산과 사이로 기어기어간 옛길이며 가난했어도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던 순정을, 빈집에 돌아올 사람처럼 기다릴 수도 있겠다. 시의 미래와 사람 살이의 미래가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출판사,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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